교회사

''동방의 사도'' 하비에르 성인 탄생 500돌

코람데오 요세비 2006. 7. 27. 15:57

'동방의 사도' 하비에르 성인 탄생 500돌

기념행사 프랑스 루르드, 29일부터


▲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왼쪽부터)와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베드로 파브르가 그려진 이콘. CNS 자료사진

'동방의 사도'로 유명한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 성인 탄생 500주년을 맞아 전세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 회원들이 29일~8월1일 프랑스 루르드에서 국제 행사를 연다.

 전세계 회원 600명 이상이 모이는 이번 행사는 △젊은이 복음화 △문화 복음화 △현대에 필요한 복음화 방식 등에 대한 국제 회의와 나눔으로 진행한다. 한국에서는 하비에르 국제학교 문명숙(마리아, 49) 교감을 비롯해 5명이 참석한다.

 또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적 친구 이냐시오 로욜라(?~1556) 성인을 기리는 행사도 열려 전세계 예수회 회원들도 모인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삶과 영성

 인도와 일본에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해 '희망봉부터 인도와 중국,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북(北)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이다.

 그는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당시 유럽 최고 대학인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개인 영광에 목표를 두던 그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 나라 영광'으로 돌아선 것이다.

 1529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534년 8월 성 이냐시오를 포함한 다섯 동료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 순교자성당에서 '예수회'를 설립한다.

 그 후 1541년 포르투갈 왕 요청에 따라 교황의 동방특사 자격으로 리스본을 떠나 1년 뒤 포르투갈령 동인도 수도 고아(Goa)에 도착, 3년간 전교활동에 전념한다. 1545년 9월경 말레이반도 믈라카(Malacca)에 상륙한 그는 이듬해 1월 뉴기니아섬 서쪽 몰루카스제도를 방문하고 믈라카로 돌아오다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세례를 준다. 그리고 3년 뒤 그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2년 3개월간 복음을 전파, 일본교회 복음화에 큰 영향을 준다.

 일본에서 복음를 전파하던 중 중국이 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중국 선교로 목표를 수정해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믈라카를 거쳐 이듬해 인도 고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상치안 섬에서 약속된 안내자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544년 1월15일 인도에서 쓴 그의 편지에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주여,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 엘렌 르브렝(헬레나, 71) 교장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영성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조건없는 신뢰'"라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으로 흔들림이 없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문명숙 교감은 성인에 대해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인도와 일본을 방문해 전교에 앞장섰던 성인께서 가져간 것이라곤 수단과 성경책 뿐이었다"면서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 맨발의 성인"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성인 탄생 500주년인 동시에 하비에르 사도회 창립자인 마들렌느 다니엘루(1880~1956년) 서거 50주년, 그리고 하비에르 성인을 성직으로 이끈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 서거 450주년이다.

이힘 기자lensman@pbc.co.kr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작은 마을, 밤은 내렸지만 달은 보이지 않습니다. 러시아 횡단을 마친 저는 이 마을에 꼭 들르고 싶었습니다. 500년 전, 프란치스코라는 한 남자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이 마을을 떠났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소르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생이 됐고, 모두들 그를 흠모했습니다. 단 한 사람, 멀고 먼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유학 온 이그나티우스만 예외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너무 자네 생각만 하면서 사는 것 같아. 다른 것들에 투신해보는 건 어때? 그러니까 신 같은 존재에 말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르본에서 가장 잘생기고 당당한 학생이었던 프란치스코는 이그나티우스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이내 다른 학생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고, 그들이 모이는 방문에 조롱조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떠납니다. 그후 십 년 동안 그는 아프리카와 인도, 수마트라, 몰루카와 일본을 여행합니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병원과 감옥, 도시와 마을을 찾아다닙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편지를 띄우지만 어느 편지에서도 자신이 머무르는 곳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혜택받지 못한 이들에게 격려와 희망의 말을 건네려 할 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고아(Goa)에 묻힙니다. 세상이 너무나 넓고 그 거리가 도저히 좁혀질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전쟁에 시달리던 그 시절,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한 마을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이 지닌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바다와 항해,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자취가 불멸이 될 것임을, 그리하여 그가 뿌린 씨가 열매 맺으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는 자아의 신화,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인도 아메다바드 시의 한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대해 묻자, 한 소년이 대답합니다.

“그는 위대한 건축가였을 거예요. 학교를 많이 세웠잖아요. 동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많아요.”

그 학교들 중 한 곳의 교장인 안토니오 팔체스는 그가 들었던 학생들의 대화를 내게 들려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포르투갈인이었어.”

어떤 이의 말에 다른 이가 대꾸합니다.

“그렇지 않아. 그는 고아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거기에 묻혔잖아.”

학생들은 모두 틀렸고 또한 모두 옳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바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세계인이었고, 그가 머물렀던 곳의 모든 이들이 그를 자기네 나라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학교를 짓는 건축가는 아니었으나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작가는 그를 “태양 같은 사람, 지나는 모든 곳에 빛과 온기를 전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이그나티우스는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바티칸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붙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성 이그나티우스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더 큰 기적을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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