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먼 기억속에 와키다 주교님

코람데오 요세비 2006. 9. 4. 16:13
배추가 김치가 되기까지 다섯 번 죽는다고 한다. 제일 먼저 땅에서 뿌리채 뽑히는 죽음을, 두 번째로 칼로 네 동강나는 죽음을, 세 번째로 소금에 절이는 죽음을, 네 번째로 양념에 비벼지는 죽음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입속에서 씹히는 죽음을….

교구사에서 교구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어쩌면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싶다. 교구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교구장 와키다 주교님에 대한 기억이 교구민에게는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언급되지 않은 와키다 주교님의 생을 생각해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한 사제로서, 그리고 교구장으로서, 교구민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적대국 출신으로서 얼마나 고독한 삶을 살으셨을까? 많지 않은 협조자 속에서 복음화의 과정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마도 배추가 김치 되는 과정처럼 여러 번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죽이셨을 것이다. 
와키다 주교님의 삶을 짧은 지면으로 살펴보자. 광주교구 2대 교구장은 와키다 아사고로(토마스:1881-1965)신부였다. 그는 1881년 10월 26일 나가사키 현의 히사카 섬에서 태어났다. 1909년 7월 나가사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나가사키 현과 구마모토 현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한국 교회에서 사목 중이던 서양 성직자들을 국외로 추방하거나 감금하였다. 즉 미국인, 영국인 등 교전국가의 성직자들은 적성국인(敵性國人)으로 몰아 추방하였고,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 성직자들과 중립국가인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성직자들은 준적국인으로 단정하고 일정한 지역에 연금시켰다. 초대 지목구장이었던 골롬반회의 맥폴린 몬시뇰은 일제의 사임압력에 의해 사임하고 1942년 12월 지목구장으로 와키다 신부가 임명되어 입국하였다. 

와키다 신부는 당시 교구청이 있던 목포로 내려가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2월 7일 목포에서 지목구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43년 말경에는 북동본당의 사제관을 증축, 수리하고 교구청을 광주로 이전한 뒤 광주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그동안 와키다 몬시뇰을 도와 북동본당 신자들을 돌보던 김재석 신부가 1944년 여름 신병 때문에 영광으로 이임하자 와키다 교구장의 일본어 강론은 통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세는 자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신자 수는 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러던 중 1931년 신학공부를 시작한 장옥석 루치오 신학생이 1944년 성탄 때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1월 9일 제8대 북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목에 심혈을 기울였다. 

와키다 교구장은 일제 말기의 약탈이 심했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본당 내 탁아소를 설치하여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와키다 교구장은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10-11월경 노기남 주교의 도움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종전 직후에는 일제의 잘못을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노기남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그 뒤 1947년 3월 제4대 요코하마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5월 27일에 주교로 서품, 착좌하였고,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요코하마 교구의 부흥과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1951년 교구장직을 사임한 와키다 주교는 만년에 병환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3월 16일 선종하였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기억에 의하면 병환 중에도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해 자주 고해성사를 청하며 임종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옥현진 시몬 신부 
( 운남동 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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