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1831년 9월9일 조선교구 설정

코람데오 요세비 2006. 9. 5. 14:34

코스모스가 바람에 일렁이는 9월이면 순교자 성월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순교자 성월에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까지 바치신 순교자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며 그 분들의 모범적 삶을 본받아 신앙쇄신의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요즈음 순례자들 가운데 ‘영성의 허기진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 사람들이 더위를 먹고 땀 흘리는 와중에도 고되고 힘든 현실의 벽에 부딪쳐 헤매는 사람들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았습니다. 직장 공동체 같은 갈등 구조 속에서 고뇌와 고통으로 좌절하는 사람들, 가난의 더깨에 짓눌려 ‘쓸쓸한 눈빛’으로 아무데서나 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의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물질중심으로 살다 보니 하느님은 뒷전이고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영신적으로 늘 목이 마르고 쉽게 갈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복잡한 도시인들은 절두산 순교 성지를 비롯 전국 곳곳에 산재한 순교 성지를 찾고 있습니다. 이처럼 순교정신의 경이로운 체험을 원하는 성지 순례객들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름 모를 순례객을 만나면 “고요한 성지의 새벽 산책길에서 이슬 한 방울에도 순교자의 얼이 스며 있음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며 진정한 신앙인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가르침과 그 뜻을 따르는 삶으로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만들었고 마침내 성체성사의 은총을 순교로 응답했던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984년 하느님의 자비와 순교자들의 굳은 신앙을 기리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과 103위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축제를 계기로 ‘성지순례 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시성작업이 추진되어 다시 한 번 순교자 현양과 성지순례 운동이 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난 해 11월, ‘성지순례, 하느님께서 오늘 아시아에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2차 성지순례사목 아시아 대회’는 진정한 성지순례의 모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 땅 대부분의 성지는 순교자들이 피흘려 증거한 순교지, 순교자가 묻힌 자리, 태어나고 사셨던 곳입니다. 우리는 성지순례를 통해 그분들의 신앙과 순교의 삶을 묵상하면서 시대를 초월한 연대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지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소로 성지순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한 후 감사와 찬미, 사랑의 실천과 나눔의 삶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는 김대건 신부 순교 160주년과 순교자현양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성지순례 운동을 새로운 시각과 차원에서 현양 운동을 펼칠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내 사적지(명동성당, 서소문·당고개·새남터·절두산·삼성산 성지 등)를 비롯하여 전국에 있는 성지안내로 확대 실시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산새소리와 함께 해맑은 울창한 숲 속 그루터기에 앉아 묵상과 기도로써 몸과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껴보지 않으시렵니까? 순교정신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성지순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열심한 후원회원이 되어 주십시오.

“믿음으로 솟아오르는 산이 되고
사랑으로 흘러 넘치는 강이 되고
겸손으로 부서지는 흙이 되게 하소서”
- 김대건 신부 기도문 중에서

홍화순 마태오·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회장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1가 2-3 평화빌딩 3층
·문의: 2269-0413(www.martyrs.or.kr)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특집

아!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

서울대교구는 ‘2006 성체대회 장엄미사’를 준비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신 신비를 우리 삶에서 체현하고자 성체대회 관련 일정과 실천사항 5가지 등을 몇 차례에 나누어 ‘서울주보’에 게재하였습니다. 장엄미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9일 기도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신비를 삶으로 보여 주신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을 돌아봅시다. 두 분의 삶을 통해 우리 신앙 선조의 덕을 본받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시다.

"초대 조선교구장 소(蘇) 주교의 묘소. 1835년 10월20일 세움”

모방(나 베드로) 신부가 중국 내몽구자치구 적봉의 오지 마을 마가자 교우촌에서 축성했던 브뤼기에르(소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 묘소의 ‘원묘비’에 새겨진 글귀이다.

지난 3월, 그로부터 17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의 한 본당 교우들에게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 원묘비. 브뤼기에르 주교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모방 신부가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을 묘비. 몇 자 안 되는 그 묘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앙과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31년 9월9일 조선교구 설정과 동시에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 그 이전까지 어느 선교사도 저 극동의 작은 포교지인 조선 교회를 맡으려 한 적이 없었다.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겠다’는 교황청의 결정에도 조선에 들어가기 어려운 데다가 그 곳에는 박해로 인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모두가 망설였다. 오히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떠넘기려는 선교 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딱 한 명의 선교사. 당시 샴(지금의 태국) 교구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핍박받고 있을 양 떼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선교사로서의 본분을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그리고 외방 전교회 본부에 편지를 냈다.

“과연 저 위험한 조선 선교를 어느 선교사가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주교 서품을 받으면서도 브뤼기에르 신부 자신은 결코 조선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고 샴을 출발하여 싱가포르로, 마닐라를 경유하여 마카오로,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미지의 땅 중국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한 동료 선교사가 그를 말렸다. 그러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가 조선 입국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합니다.”
- 불가능은 시도해 보아야 알겠지요.
“조선으로 가는 알려진 길이 전혀 없습니다.”
- 그럼, 길을 하나 만들어내야지요.
“아무도 주교님을 따라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 그건 두고 봐야지요.

열병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끊이지 않고 괴롭혔다. 안내자들은 박해의 두려움 때문에 거지나 다름없는 복장을 주교에게 권했고, 벙거지와 눈 주위를 가린 검은 천은 열로 시달리는 그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그는 ‘고통과 고뇌가 흐르는 급류’를 헤쳐 나가면서 저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니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죽음만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거친 황야와 양자강의 위험, 그리고 황하의 누런 물결과 만리장성을 넘어야만 하는 오랜 여정. 마카오를 떠난 지 거의 2년 만에 도착한 곳이 이른바 달단 지역의 서만자 교우촌(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숭례)이었다. 다행히 여기에는 기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 헤어졌던 모방 신부와 국경 지대에서 전달되어 온 조선 교회 밀사들의 서한.

그러나 포르투갈 출신의 북경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원치 않아서 조선 입국로 주변에 사는 교우들에게 주교의 숙소를 제공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먼저 조선에 들어간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도 북경 주교와 같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난관에도 주교의 의지는 굳건하였다.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교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저는 국경으로 가서 조선 교회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보내 주신 주교를 받아들일 만한 용기를 가진 교우가 적어도 한 명쯤은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는 ‘주교님을 조선으로 모셔들이겠다’는 조선 교회 밀사들의 언약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1835년 10월7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서만자 교우촌을 떠났다.

1차 목적지는 내몽고의 마가자. 모방 신부와 중국 교회의 밀사들이 중간 거점으로 삼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실한 종이 당신 사업을 완성하기보다는 그 사업에 전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셨다. 다리가 붓는 수종병에다 오랜 여정의 노고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걸음을 거기서 멈추게 하고 만 것이다. 주교와 함께 한 라자로회의 고 신부는 끝내 감기지 않는 주교의 눈을 감겨드려야만 하였다. 1835년 10월20일, 향년 43세였다.

자신이 처음부터 예견했던 것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토록 강한 의지에도 자신의 양 떼들이 기다리는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홀홀 단신 마가자로 달려온 모방 신부는 동쪽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장소에 자신의 장상을 안장하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방 신부는 그 곳 신자들이 만든 묘비에 주교의 한자 성(姓)인 ‘소(蘇)’자를 새기도록 하여 묘소 앞에 세워 드렸다.

다시 홀로 남겨진 조선 교회.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발탁한 모방 신부가 있었고, 산동 지방에서 조선 입국을 엿보던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가 있었다. 또 사천 지방에서 활동하던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신부도 언제고 조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조선 교회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았고, 또 다른 방향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2006년 9월 3일 주보

차기진 루카·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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