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옛날에

고양현

코람데오 요세비 2014. 10. 2. 10:18



고양현(高陽縣)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행주(幸州)는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용산처(龍山處)는 본래 과주(果州)에 속하였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1년. 】

부원현(富原縣)으로 고쳤으며,


황조향(荒調鄕)은

부평부(富平府)에 속하였었는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서기1394년)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 監務)를 두고,

행주·부원현·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13년 계사에(1413년 음력 3월 23일)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3월 23일(임인) 2번째기사 입니다.

 

○改高峰縣爲高陽縣。 高峰屬縣幸州之人上書曰: “幸州, 昔爲德陽縣, 而高峰乃屬縣也。 自合屬後, 官號只稱高峰, 而德陽反爲屬縣, 又無稱號, 非他合屬之例。 請改之。”

 

  고봉현(高峯縣)을 고쳐 고양현(高陽縣)으로 하였다. 고봉 속현(屬縣) 행주(幸州) 사람이 상서(上書)하였다. “행주는 예전에 덕양현(德陽縣)이 되었고 고봉은 속현이었는데, 합속(合屬)한 뒤로는 관(官)에서 부르기를, 단지 고봉이라 하여, 덕양이 도리어 속현이 되고 또 칭호도 없어서 다른 합속한 예와 다르니, 청컨대, 이를 고치소서,”

 

  가만히 잘 있던 현의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행주에 살던 사람이 현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청원한 결과, 현의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과거 행주에서 덕양현으로 바뀐 후, 덕양현이 주현이고, 고봉현은 속현이었는데(고려시대 속현제도를 국사시간에 배우셨을 겁니다.) 이후 두 현을 합치면서 속현이었던 고봉현의 이름이 주가 되는 바람에.. 주현이던 덕양의 이름이 오히려 속현인 고봉에 묻혔다는.. 억울함(?)에서 시작된 일인 듯 합니다.

  물론, 여기서.. 주현이던 덕양현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고봉현과 덕양현을 합쳐서 고양현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었고.. 이 것으로 현재까지 600년이 이어지는 현재의 지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위의 기사 외에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세종실록지리지(地理志) 경기(京畿)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 고양현(高陽縣) 조를 보면..


  ◎ 高陽縣: 本高句麗  達乙省縣, 新羅改名高烽, 爲交河郡領縣。 【金富軾云: “漢氏美女於高山頭燃烽火, 迎高麗  安藏王之處, 故名高烽。”】  幸州, 本高句麗  皆伯縣, 新羅改名遇王, 爲漢陽郡領縣, 一云王逢縣。 【金富軾云: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高麗改爲幸州。 【別號德陽, 淳化所定。】 右二縣, 顯宗戊午, 皆屬楊州任內。 龍山處, 本屬果州, 高麗  忠烈王十年甲申, 【卽元  世祖  至元二十一年】 改爲富原縣。 荒調鄕, 本屬富平府。 本朝太祖三年甲戌, 始置高峯監務, 以幸州、富原縣、荒調鄕屬之。 太宗癸巳, 取高峯、德陽兩縣名, 改爲高陽, 置縣監。 四境, 東距楊州六里, 西距交河三十里, 南距大江十五里, 北距原平十五里。 戶六百七十九, 口一千三百十四。 軍丁, 侍衛軍六十五, 船軍二十。 高峯縣土姓一, 高; 亡姓四, 秦、唐、宋、田。 幸州土姓四, 金、奇、殷、田; 亡姓七, 崔、康、夫、則、高、邢、車; 來姓一, 李。 富原縣土姓一, 邊。 厥土肥?相半, 墾田六千三百二十六結。 【水田差少】 土宜五穀, 粟、唐、黍、蕎麥、小豆、芝麻、桑、麻。 土貢, 芝草。 藥材, 殺男草。 驛一, 碧蹄。 烽火三處, 所達山, 【在縣北, 北準原平城山, 東準京城毋岳。】  城山、【在縣西, 北準交河劍斷山, 東準蜂峴。】  蜂峴。 【在縣東, 西準城山, 南準京城毋岳。】  大慈寺、【在縣北。 太宗元敬王后季子卞韓昭頃公早卒, 爲作齋庵于墓南, 屬禪宗, 給田二百五十結。】  鴨島。 【在縣南江中, 東西七里, 南北四里。 繕工監草?場。】

 

  



◎ 고양현(高陽縣)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용산처(龍山處)는 본래 과주(果州)에 속하였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에【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1년. 】부원현(富原縣)으로 고쳤으며, 황조향(荒調鄕)은 본래 부평부(富平府)에 속하였었는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부원현·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 계사4938) 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만..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글로 남은 내용을 정리하면.. 저 정도인데.. 앞서 태종실록의 기사에서 “행주는 예전에 덕양현(德陽縣)이 되었고 고봉은 속현이었는데.."라는 부분과 세종실록 지리지 중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를보면.. 고려 현종 때 양주군 관할로 들어가면서 덕양이 주현이 되고, 고봉이 속현이었던 모양입니다.


  이후, 태조 때 고봉, 행주, 부원현, 황조향을 묶어서 고봉감무에 속하게 하면서.. 고봉현이 주현이 되었고.. 이에 대한 상소를 통해서 고봉과 덕양을 합쳐 고양이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고양시 역사 -



구석기 시대 : 옛송포면 일산읍지역에서 석기류(찍개, 끌개, 몸돌 등)가 발견되어 적어도 5만년 이전부터 고양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신석기 시대 : 일산신도시 지역(신촌초등학교 지역, 성저마을)에서 토기, 볍씨(4천4백60년전 것으로 판정), 나무열매 등 신석기 시대 농경생활 및 자연환경을 알 수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 : 유적은 곡릉천, 창릉천, 원당천, 장진천 등 하천에 따라 펼쳐진 언덕진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문봉리, 화정리 지역의 지석묘군, 성사리출토 동모용범편등이 있다.


삼국-통일신라 시대 : 고양지역이 선사시대에 이어 역사무대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건국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성을 함락시킨 이후 고양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귀속되었다. 고구려는 고양지역 내에 달을성현과 개백현을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 진흥왕 16년(555)에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고양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여 군사적 요지를 삼았다. 통일신라시대에 고양지역은 한산주에 소속되었고 달을성현을 고봉으로 개백현을 우왕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 태조 23년(940)에 우왕현을 행주로 바꾸고, 별호로 덕양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현종 9년(1018)에 고봉현과 행주현 두 현을 양광도의 양주에 속현으로 예속시켰다.


조선시대 : 태조 3년(1394)에 고봉감무를 설치하고 부원현과 황조향(옛 일산읍 주엽리 일대)을 고봉현에 예속시키므로써 속현이 아닌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위로 승격되었다. 태종 13년(1413) 현의 명칭을 고봉과 덕양 두현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고양현이라 바꾸었다. 성종 원년(1470)에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지언, 이오을, 미장수 등이 국왕을 모독했다는 죄로 처벌당하면서 죄인이 살던 곳이라 하여 혁파되었다.


개항이후 현재 : 근대적개혁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제도가 자주 변화 변화하면서 고양군의 소속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1914년 고양군은 12개 면(용강,연희,은평,숭인,독도,한지,벽제,신도,원당,지도,송포,중면) 155개 리로 구성되었고, 고양군청은 지금의 충정로1가로 이전하였다. 1936년 용강면,연희면,한지면이 한성부로 편입되고 고양군청은 지금의 동대문 부근인 을지로 5가로 옮겨졌다. 1945년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서울시 행정구역 팽창에 따라 일부 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고양군은 원당,벽제,신도,지도,송포,중면의 6개면만 관할하게 된다. 1961년 8월 군청을 서울시에서 원당면으로 옮겼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벽제, 지도, 화전, 일산, 원당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능곡,원당,일산을 중심으로 도시화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9년 4월에 일산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옛 일산읍 일산리, 마두리, 장항리, 백석리, 주엽리 일대에 560여 만평의 일산 신도시 건설이 시작되었고 이어 중산, 탄현, 성사, 화정, 능곡,행신지구의 택지개발지구가 추가로 발표되면서 마침내 1992년 2월 고양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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