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옛날에

웅어와 행호 관어

코람데오 요세비 2014. 1. 13. 16:27

 

웅어는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나오는 물고기이지만,

봄철 산란을 위해 한강으로 오를 때가 가장 맛있다 한다.

조선 시대에는 강변에 웅어소(葦魚所)를 두어

하강 하류에서 잡히는 웅어를 궁중에 진상하였다.

웅어는 궁중 조달 물품으로서 맛도 있지만,

철에 따라서는 제사상에도 정찬으로 오르는

중요한 품목이었다(澤堂別集제16권, 雜著, 祭饌). 

위어소는 사옹원(司饔院)의 한 분장(分掌)이며,

웅어의 명산지인 한강 하류 고양(高陽)에 있었다.

광주(廣州)의 사기소(砂器所)와 양천(陽川)의 위어소(葦魚所),

안산(安山)의 소어소(蘇魚所 밴댕이를 잡아 진공하던 곳) 등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명칭이다(성호사설 제15권, 人事門).

한강에 위어소를 두어 웅어잡이를 관리했다 하지만,

나라에서 직접 웅어를 잡은 것은 아니었고,

웅어소에 소속된 어민들이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웅어소는 5개 읍에 3백여 호가 소속되어 있었고,

나라의 땅(田地八結)을 짓는 대신 웅어를 잡는 부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호수가 1백여 호로 줄고,

땅도 줄어 위어소 운영이 어려움을 사옹원에서 왕에게 고하고 있다.

게다가 웅어잡이 외에 다른 부역(戶役)도 증가하고 있어

웅어의 진상이 어려우니 땔나무나 궁궐 조성에 쓰는 재목을 마련하는 것 등의

새로운 역은 지금 이후로 일체 부과하지 말고

오로지 물고기를 잡아 진상하는 일만 시키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왕이 허락하였다(광해군 10년 4월 1일, 1618년). 

 

위어소에 소속된 어부들은 웅어를 잡아 진상하는 대신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이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어민들이 어려움을 겪은 모양이다.

인조시대에도 사옹원에서 웅어를 잡는 어호 20호의 조세,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 

“웅어를 잡는 어호에게는 급복(給復)해 주었는데,

지난번 호변(胡變)과 흉년을 만나 줄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상하는 물품을 모두 이미 옛날대로 복구하였으니,

어부 20호(戶)에게 도로 급복해 주어 예전대로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1630년 1월 18일).

웅어를 궁중에 진상하는 웅어소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물량을 제 때 잡는 것은 큰일이었다.

이를 어기면 상부의 견책이 따랐다.

정조왕 때 일성록에 사옹원이 아뢰기를

‘위어소에서 봉진하는 물종이 소량이고 또 크기도 매우 작다’며

해당 관리(監捉官)을 벌주도록 상소하고 있다(정조 4년 1780년, 4월 20일).

웅어야 철에 나오는 물고기이지만

어느 해는 안 잡히는 수가 있어 웅어소를 담당한 관리의 입장은 난감할 수 있다.

웅어가 잡히지 않아 대신 염소어(鹽蘇魚)로

진상토록 해 달라는 사옹원의 보고도 있다. 

“위어 감착관(葦魚監捉官)의 보고를 보니,

어살을 설치한 초기부터 위어가 까닭 없이 드물게 알을 낳았고

연이어 장마를 만나 어망을 설치해 위어를 잡을 수가 없었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50일이 위어를 잡는 기한인데,

절기가 너무 늦어 기한 내에 할당량만큼 잡아 바칠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어렵게 고한 것이었지만 왕이 허락했다(승정원일기, 고종 5년 1868년) 

웅어는 그물로도 잡았지만

어살을 설치해 잡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한강에는 위어소 말고도 권력 있는 자들의 어살이 있어

웅어소와 어로경쟁을 한다.

일부 권력층이 웅어를 잡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성종 임금의 형인 원산대군이 난지포(難地浦)의 어획권을 받았던(立案) 것을

권신 박원종(朴元宗)이 이어하고 있었다.

사옹원의 한 관리가 이 어업권을 인정하지 않자,

박원종의 처 윤씨가 상소를 한다.

임금은 ‘진상을 핑계 삼아 개인 어로를 제한함은 부당하다’며

관리를 벌주려 한다(승정원일기, 중종 11년, 1516년 6월 4일).

그러나 주위에서 부당함을 말해 벌은 받지 않는다. 

궁중에 필요한 웅어를 조달하는 관리 입장에서는

어부들에게 일정한 배정을 주는데

과다히 추가 배정을 했다 하여 벌을 받기도 한다(왕조실록 인조 3년, 1625년 3월 8일). 

“....사옹원이 무단히 더 배정한 소어(蘇魚)와 위어(葦魚)가 각각 2천 속(束)이나 되니,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서도 여타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상공(上供)을 많이 감했는데도 백성의 부담은 늘어났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웅어가 나라의 관심이 되다보니

웅어소 관리는 물품을 제대로 조달하기 위해 고생을 했을 터이고,

또 일부 관원은 쥐꼬리만한 권력을 빙자해

어민을 쥐어짰을 수도 있다.

김재찬의 시 ‘漁父四時詞, 春’(金載瓚, 1746~1827년, 海石遺稿卷之一) 에 이런 모습이 일부 나온다.

 

‘고기 잡아 위어소를 지나지 말라,

애써 잡은 웅어를 관리가 뺏는다네

(捉魚莫過葦魚所, 辛苦得魚官吏奪). 

 

아무튼 웅어를 둘러싼 행주 강변에 어민의 애환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봄이 오는 강에서 웅어잡이 하는 모습은

시인묵객의 눈에는 멋지게 보이는 광경이다. 행주의 봄을 읊은 시가 있다.

 

<杏洲曲, 其二三> 金昌業(老稼齋集卷之五) 

樓高萬松間, 俯臨滄江流. 自言以駿馬, 換一葦魚舟. 

僮僕慣操網, 乘潮上下頻. 春來得魚多, 時寄城中親. 

다락은 높이 소나무 사이에 있고, 굽어보면 푸른 강가에 접했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웅어 잡는 배와 안 바꾸네. 

머슴들 그물질 버릇이 되어, 물살을 타고 아래위로 다니네. 

봄철이라 물고기 많이 잡히면, 때때로 성중에 있는 친구에 보낸다. 

 

또 행주 강에서 웅어잡이를 하는 그림도 있다.

겸재의 정선의 그림 ‘杏湖觀漁’는 행주에서 웅어를 잡는 모습이다.

그림에는 웅어잡이가 한창이라 배가 떼를 지어 강을 막고 있다.

겸재는 당시 양천 현령으로 인근 산(巴山)에 올라 웅어잡이의 장관을 보고 그린 것이다.

겸재의 친구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은 이 정경을 이렇게 읊고 있다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303쪽, 동아일보사, 2006년) 

 

春晩河豚羹, 初夏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湖外.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엔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히 떠내려 오면, 어망을 행호 밖에서 잃겠구나.

 

웅어와 얽힌 애환과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멋진 글이고, 멋진 그림이다.

 

행호관어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월산대군이 행주에서의 낚시를 즐기며 지은 싯구도 운치가 있습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뫼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뫼라.

무심(無心)한 달빗만 싯고 빈 배 저어 오노뫼라.

  

월산대군이 지은 시이다.

추강(秋江)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앞의 한강을 말한다. 

한양을 떠나 경기도 고양시 능골(신원동)마을에

별장을 짓고 생활하던 월산대군이 인근 행주산성 앞에 있던

추강(秋江)에서 낚시를 하며 지은 시이다.

조용히 낚시를 즐기는 유유자적한 한가로움과

고기 대신 달빛만 빈 배에 싣고 돌아오는

월산대군의 넉넉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월산대군(이 정,1454 ~ 1488) 호는 풍월정(風月亭).

단종 ~ 성종. 덕종의 맏아들로 성종의 형.

서사(서사)를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 작품이 중국에까지 널리 애송되었다.

저서로 풍월정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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