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행주성당

코람데오 요세비 2008. 9. 27. 12:59

행주성당이 내년이면 건립 100주년이 된다. 1909년 초대 김원영 신부가 부임하자마자 이듬해 본당이 신축되어 이제 100년의 세월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6·25이후 50여 년을 다시 신부가 없는 공소로 존재하다가 2004년 의정부 교구 행주 본당으로 부활하게 됐다. 한 때 신자수가 2000여 명에 달했고 현재까지 행주성당에 재임했던 신부는 11명을 헤아린다. 행주성당 건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행주성당의 역사와 가치를 더듬어 본다.

▲ 성당 앞 종루에는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재래종이 있다 / 사진 한진수 부장
행주산성을 지나 자유로 진입로 우측에 박힌, 행주공원을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 100m 가량 가다보면 언덕에 낡은 한옥 한 채를 만나게 된다. 본당 앞 종루에 있는 재래종이 아니었다면 성당이랄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기왓집이다. 얼핏보면 시골 여염집 같기도 하다. 이 곳이 바로 일제라는 가혹한 시대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견뎌내며 나라의 독립을 일구던 신앙선조의 얼이 살아 숨쉬는 100년 역사의 행주성당이다.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94번지.

본당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 곳이 성당임을, 더구나 100년이라는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유서 깊은 성당임을 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신발을 벗고 서늘한 마룻바닥을 걸으면 천장의 소나무 들보와 기둥, 서까래가 안기는 고풍스러움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 그림 10여 점에서 풍기는 종교의 경건함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조선의 전통과 외국에서 건너온 종교가 이런 식으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에 신축된 행주성당은 경기북부와 고양시에서는 최초, 서울교구에서는 명동, 약현, 왕림, 인천 답동, 수원, 미산리, 장호원, 감곡, 안성 다음으로 9번째이며 한국에서는 28번째 성당이 된다. 행주성당이 문을 연 당시에는 고양을 비롯해 인근의 연천, 김포, 파주, 양화, 부평, 강화까지 그 관할지역으로 삼았다. 현재 신자는 행주동 지역 주민들로 총 76세대 350여명이다.

해상교통 중심 행주에 1899년 공소 세워져

해상교통이 발달했던 19세기 후반 행주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곡식을 실은 한강의 배가 서울의 마포나루 등을 오갈 때 날이 저물거나 노 젓는 힘이 부쳐 쉬어 가는 곳이 바로 행주였다. 따라서 이 곳에는 점차 상가와 마을이 번성하게 됐다. 초기 서양 신부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행주는 당시 큰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경기 서북부에서 최초로 행주에서 성당이 지어지게 된 연유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듀세(Doucet) 신부의 1891년 기록에 의하면 “(고양에) 1866년 대박해 때에 거의 사라진 큰 신자 마을이 이제 몇 년 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남아있다.

▲ 1960년대 행주성당의 전경

행주성당 100주년 기념 사업회의 박광배 총괄본부장은 “1892년경 영세를 받은 신자 몇 사람이 이미 이곳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 본인의 증조 할아버지도 포함됐다”며 “왜 행주에 성당이 생겼는지를 유추해보면 교통중심지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그 사람들 중에 신자들이 당연히 많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행주 일대의 신자들에게 외국선교사가 파견됐으며 서울악현성당(현재 중림동) 행주공소가 최초에 세워진 해가 1899년이었다. 이후 1908년에는 초대 김원영 아오스딩 신부가 부임하고 1909년에는 사제관이 건립됐으며 고양시 최초의 근대학교인 신양학교도 설립된다. 사제관 건립 당시에는 신자수가 682명이었다.

3·1 운동 당시 800여명 독립운동에 참가

1910년 8월 9일 성모승천성당(현 행주성당)이 신축되면서 당시 성당 내부의 들보와 기둥 등 건축형태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전통의 조선 기와를 허물고 현대식 기와로 본당을 덮었다. 성당 왼쪽에 튀어나온 출입문이 있는데 남녀구분이 엄격하던 신축 초기에 여성 신도들이 따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박 본부장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 신도들은 지금도 꼭 이 문으로 드나들고 있다”고 전했다. 행주성당 신축 당시 신양학교 학생은 49명으로 교사는 리호상이었다. 1910년 신축 이후 행주성당 본당 건축물은 이후 여러 차례의 개보수를 했고 그 기록이 남아있다. 전통 한옥의 원형 그대로 간진 한 본당 내부의 기둥은 도끼나 대패 등 전통 목공예 기법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전해준다. 이 밖에 대들보, 처마, 보, 서까래 등도 전통한옥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도 가진다.

▲ 1932년 신부가 기거하는 사제관 전경

일제 강점기 때에는 당시 부임했던 신부들이 일제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해외로 강제 추방당하기도 했다. 홍승권 신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적국 출신의 신부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강제 추방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신부들과 신도들은 3·1 운동 당시에는 지역민들에게 독립 만세 운동의 참여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당시 지도리 행주면 주민 8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광복 직전에는 일제가 외국인 신부를 일제히 추방하면서 국내 전체 신부의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되고 행주성당 역시 6·25를 거치면서 신부가 없는 공소로 격하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 폭격이 피해간 유일한 건축물

▲ 1960년 9월 25일에 찍은 행주주일학교 학생들의 모습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종교 건축물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다는 제네바 협약에 의해 행주성당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들의 폭격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한국전쟁 당시 행주성당은 인민군 부대들의 작전장소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행주성당 내부의 기둥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총탄이 스치고 지나간 자국에서 동족상잔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다. 전쟁 당시 전국적으로 피랍 돼 행방불명된 신부가 여러 명 있었는데 행주성당의 김성환 신부와 세 명의 수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현재 재임 중인 행주성당 홍승권 신부 / 사진 한진수 부장
전쟁 이후에도 행주성당은 강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지역 주민들의 고난을 함께 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행주성당은 6·25로 신양학교가 붕괴되고 오랫동안 신부가 없는 공소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 11월에야 의정부 교구의 출범과 함께 50여년 간의 긴 공소에서 벗어나 본당으로 부활하게 된다. 현재 11대인 홍승권 안드레아 신부가 재임 중에 있고 사제관은 신양학교가 있던 자리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행주성당에는 매주 수요일이면 지역주민대표, 주임신부, 교회사 관련 연구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100주년 사업과 관련한 회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행주성당과 관련한 모든 역사적 기록, 사진, 증언 등 연구자료를 수집하여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최종적으로 100주년 기념지를 발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행주성당을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오는 25일에는 행주성당의 오랜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사진전이 열린다. 박광배 본부장은 “편찬사업본부, 건축사업본부, 홍보사업본부, 행사사업본부, 영성사업본부를 두어 100년 역사를 간직한 행주성당이라는 건축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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