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금강수원 뜸봉샘

코람데오 요세비 2007. 8. 14. 23:13

[이규태코너] 금강수원 뜸봉샘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입력 : 2005.07.14 19:16 07'

1800년 들어 30년 단위로 신유(辛酉)·기해(己亥)·병인(丙寅) 세 차례의 천주교 대박해가 있었다. 팔도를 휩쓴 검거망을 피해 신도들은 남부여대하고 산속을 찾아들었다. 신도 가족 다섯 가구를 이끌고 소백산맥을 헤맸던 베드로 신대보(申大輔)의 경우를 본다. 눈이 내려 양식은 구할 수도, 품을 팔아 끼니를 이을 수도 없어 40여 식구와 말 한 마리는 고스란히 굶을 수밖에 없었다.

‘말은 나무밥통 바닥을 긁어 구멍을 내고 죽었다. 어린것들은 눈동자 돌릴 기운마저도 없어 멍하니 한곳만 노려보고들 있다. 어른들은 이토록 빠져나갈 길을 주지 않는 천주님이 너무 가혹하시다고 원망했다.’ 당시 산속을 헤맸던 많은 교도들은 이 같은 경우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유박해 때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고갯마루 가까이서 방황하던 일단의 교도들은 정착조건에 맞는 땅을 발견한다. 산등성으로 둘러싸여 넘나드는 고갯길에서 보이지 않고 화전을 가꿀 완만한 비탈이 있으며 연중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땅이다. 전라도 산간지방의 교통 중심지 남원에서 장수(長水)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인근이다.

이 샘이 뜸봉샘으로 이 샘에서 한국의 5대강인 금강(錦江)과 섬진강(蟾津江)이 갈라진다 하여 수분리(水分里)다. 200여년 신앙을 숨겨 믿어온 이 마을에는 은폐신앙 관행이 적지 않았었다.

일제시대만 해도 신도집의 토방에는 손바닥만한 조선종이 조각이 나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들추어 보면 먹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기 마련이었다. 성물단지로 통하는 바가지통이 처마 밑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 속에 십자가나 묵주, 필사 주기도문 등 신도로서의 증거물을 은폐하는 바가지통이 박해가 끝난 지 오래인데도 관행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이 수분리(水分里) 천주교마을은 숨어지내던 김대건 신부가 들렀으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계북(溪北)면 정지터골 토굴에 자리잡고 선교활동을 했던 리델 주교의 후임 블랑 주교가 들르기도 했다. 뜸봉샘을 관광지로 정비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수분리 박해 천주교의 숨어 지켜내린 신앙문화를 집성시켜 곁들이면 순례지로도 각광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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