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대구 선산읍 교회 100년사 중-1

코람데오 요세비 2010. 10. 6. 15:02

제 1장 천주교(天主敎) 의 전래 (傳來)

제 1 절 한국(韓國)과 천주교의 만남

1. 당(唐)을 통한 경교(景敎)와의 만남

경교란 동로마 콘스탄티노풀(constinople)동방교회의대주교 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합일성(合一性)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이를 분리 주장을 함으로 431년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를 둘로 갈라놓는 이단자라 정죄 되어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를 말하며 후에 중국에 들어와서 이 기독교파를 광명의 종교라는 뜻에서 경교(景敎)라 불리우게 되었다.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와 그 일파는 페르시야의 아데사 시(市)에서 신학교를 설립하여 동방선교를 계획하고 신학도를 양성하여 인도와 중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으며 635년에 당시 당(唐)나라 황제 태종(太宗)은 페르시아 사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사 알로펜(Alopen)을 만나 선교를 받아 피사사(被斯寺)라는 경교당(景敎堂)을 지었으며 “당정관년(唐貞觀年)(627~749)에 그 상하조야(上下朝野)가 다 경교를 숭상했고 대석학(大碩學)들도 믿었다”고 당태종 치세기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당나라에 경교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교가 신라(新羅)에 까지 전교 되었다는 문헌이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확증되지 않았으나 민경배(閔庚培)교수는 당태종치세기(唐太宗治世期)에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3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를 빈번히 드나들면서 외교를 강화하던 때라 그 시기에 경교가 신라에 접촉되지 않았겠느냐고 보고 있다. 그 가능성을 살려보면 1625년 중국 서안부(西岸府)근처에서 발견된 “대진경교유행 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경교의 선교내력과 선교현황을 소개한 내용)와 똑 같은 모조품이 1917년 고든(E.A.Gorden)여사에 의해 한국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발견되었다. (일설에는 골든 여사가 경교비의 탁본을 금강산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되어 이 십자가가 신라 때 것으로 경교의 십자가상이라고 김양선(金良善)교수는 보고 있으나 일부 사학자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십자가 형은 장신구로 사용한 예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입증할만한 사실이 있다. 팔라디우스(Palladius)가 19세기 초 명나라에 가서 기독교회의 사적(史蹟)을 찾아다니던 중 그는 한 책자에서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다”는 구절이 발견되었는데 이 책자가 한국의 책자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때에 경교와의 접촉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몽고(蒙古)를 통한 만남

몽고를 세운 징기스칸이 세계정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몽고의 장수 반투(扳都)가 폴란드 민족과 게르만족을 대파할 때 로마 카톨릭 교회와 기독교 국가들은 서유럽까지 침공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이 십여 차례에 걸쳐 진군하고도 회복하지 못한 성지(聖地)팔레스타인을 몽고 군이 점령하고 기독교의 순례를 자유롭게 해준 종교적 정책이 몽고선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접근하기에 이른다.

징기스칸은 종교적으로는 원시종교의 샤머니즘 기신(祈神)을 믿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종교는 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이 원칙을 실천하면서 지켜나갔다.

서구의 기독교는 여기에 힘입어 교황 인노센트 4세가 1246년 카르피니(Fr.plano. carpini)신부를 파송하여 징기스칸의 후계자 기육칸을 개종시킬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 후 여러 번 선교사를 파송한 중에 1253년 5월7일 루브루크(Gaillaume de Rubruc)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몽고의 수도 칸바리크(和林)에 와서 몽고인 기독교인을 만나 선교를 하려고 하였으나 몽고인 기독교인은 없었고 서구에서 노예로 잡혀온 기독교 신자를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루브루크”는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고려에 군 장비를 강요하든 때에 압록강까지 왔던 사람으로 자신이 보고들은 바를 로마교황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 중에 카울레(caule:高麗)라는 말이 있고 그것이 coree로 되었다가 후일 영어로 korea로 표기되었으며 그가 한국을 처음으로 세계에 소개하여 korea라는 이름을 남기게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루브루크가 교황에 보낸 서신의 내용에는 “윌리암 부키아(WM.Buchier)(대장쟁이로 몽고에 와 살든 교인)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카울레(caulei)와 만스(Mance)라고 불리우는 민족들의 사절단을 직접 목격했는데 이들은 겨울이면 동결해 버리는 바다에 둘러 쌓인 곳에 살고 있습니다. 몽고 사람들은 겨울철에 이 얼어붙은 곳을 진격해 그 나라를 침공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몽고 왕실에 3만2천 투멘(tumen)을 매면 공납하고 그 조건으로 침공을 모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몽고에 남긴 흔적은 별로 없으며 우리 나라에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교황청에 보낸 이 서간문을 통하여 카울레(高麗)라는 이름이 서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 후일 우리 교회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3.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통한 만남(1592~1598. 선조 25~31)

우리 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접촉된 시기는 임진왜란을 통한 일본국으로 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교세(敎勢)가 유럽 안에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때 중세기를 통해 로마 교회에 충성을 바쳐오던 이배리아 반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1534년에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인 스페인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이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는 길은 카톨릭 신앙을 해외로 확장하는 길뿐임을 믿고, 당시 해운력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움을 얻어 세계 선교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사비에르가 포루투갈 왕의 요청으로 1541년 인도와 극동지역 선교에 파견되어 인도의 고아(Goa)에서 떠나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들은 당시 통치자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관용아래 약 2년 동안 활동하여 3,000여 신자를 얻어 일본에 천주교의 기초를 세웠다.

1592년 4월(선조25)일본의 통치세력을 장악한 도요도미 히대요시(豊臣秀吉)는 중국, 인도 등을 침공할 야심을 품고 우선 명(明)나라를 정벌할 길을 빌려 달라는 구실로 우리 나라를 침공하게 되었으며 이때 고니시(少西行長)를 선봉장으로 제1군이(4월 12일)부산에 상륙했다.

임진왜란때 우리 나라를 1차 침공하기 위하여 출병한 왜군이 15만 여명에 달하는데 그중 1할 가량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 일본군은 5월 2일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으나 우리 나라는 곧 바로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각처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고 명나라의 후원병을 얻어 일본군을 진격하자 왜군들은 힘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여 경상도 울산으로부터 웅천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마다 진을 치고 조선을 위협했다. 이때 웅천(熊川-鎭海)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장수 고니시 유끼나가(少西行長)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으며 그의 군단의 병사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이었다. 출병 2년 동안 기후 풍토도 맞지 않고 오래 동안 전장에 시달려 병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고니시(少西行長)는 일본 예수회 교구장 코메스(Pierre comez)에 신부(神父)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코메즈는 포르투갈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와 일본인 후깐(不干)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리하여 세스페데스가 우리나라 웅천(熊川)에 상륙하기는 1594년 12월 28일이었으며 그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고니시와 함께 출전했던 일본장수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는 불교 신자로 고니시를 시기하여 도요도미 히대요시(豊臣秀吉)에게 ‘고니시’가 유럽인 선교사 세스페데스를 조선으로 불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 했기 때문에 결국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온지 6개월 여만에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그가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에 그의 활동은 왜병들 사이에만 한정 된 사역을 했을 뿐, 조선사람들은 주둔군들을 피하여 북쪽 지방으로 피난을 갔거나 깊은 산골로 피난을 한 관계로 조선 사람들에 전도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7년간에 걸친 왜란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이 5만 여명이 넘었으며 이들은 일본 군인들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서로 결탁하여 많은 포로들을 주로 규수(九州)방면에 팔아 넘겼고 이들은 노예로 마카오, 마닐라, 인도 등지로 팔려갔다. 이러한 비 인도주의적인 야만적 행위에 분개를 느낀 외국인 선교사들과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은 회의를 소집 적극적으로 포로들을 구제키로 하고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조선어로 번역한 교리서를 가르쳐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 천주교인이 된 수는 2,000명이나 되었다.

도요도미 이후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꾸가와(德川家康)가 기독교 박멸 정책으로 그 박해가 심하였다. 우리동포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순교의 피를 흘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귀양을 갔거나 감옥살이를 했거나 모진 형벌을 받은 조선 사람이 25명이었고 순교한 사람이 21명이나 되었으며 1867년 7월 2일 로마교황 피우스 9세가 순교 복자로 시복(諡福)한 205인 중에 조선 사람이 9명이나 시복을 받았다.


4.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아담 샬의 만남(병자호란)

1636년 인조 14년에 청태종 자신을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고 조선은 신하의 예를 다하도록 강요했으나, 이를 거절함에 청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인조 15년에 남한산성 삼전도(三田度)에서 굴욕적으로 청태종에게 항복하기에 이르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질로 갔으며 척화파(斥和派)의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삼학사(三學士)는 잡혀가 죽고 화의를 배척한 김상헌(金尙憲)도 귀양살이를 했다.

소현세자는 1644년까지 8년간 심양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차 청(淸)이 도읍을 북경으로 옮기자 소현세자도 북경으로 가게되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주교(主敎)일을 맡아보던 독일 예수회 신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揚苦望 1591~1666)과 친교를 맺게되어 두 달 동안을 사귀게 되었다. 아담 샬은 당시 청의 세조에게 신임을 받아 흠천감정(欽天鑑正-天文臺長)까지 벼슬을 받았으며 서양력을 본따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을 편찬했던 학식 높은 천문학의 권위자였다.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친교관계를 중국인 신부 황비묵(黃斐黙)은 이렇게 말했다. “인조의 세자가 북경에 볼모로 잡혀와 있을 때 탕약망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웠다. 탕약망도 세자가 거처하는 곳에 찾아가 오래 동안 이야기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엔 깊은 뜻을 같이한바 있었다. 약망은 천주교가 바른 길임을 이야기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와 소현세자도 천주교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자가 오랜 볼모의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환국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담 샬은 그가 지은 천문 산학(算學) 성경정도(聖經正道)등 여러 서적과 천주상(天主像)을 선물로 주었다. 소현세자는 이 고마움을 편지로 이렇게 답서를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책을 많이 박아서 이것들을 글 보는 사람들에게 펴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화할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을 받은 우리 백성이 서양 사람의 과학에서 배운 것을 모두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종교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에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혹시나 잘못하여 천주상을 더럽힐까 두려운 바입니다. 그러므로 천주상은 다시 돌려보냅니다’ 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북경을 떠나 1645년 2월 18일에 귀국했다. 세자는 귀국후 70일만에 34세를 일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현세자가 중국을 떠날 때 서양인 신부를 파송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그를 들어주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던 중국 천주교회는 이런 사연들을 프랑스에 알렸고 이를 계기로 파리성체회(巴里聖體會)는 선교사 파송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1662년에는 파리에 선교사 양성학교를 세우게 되니 이것이 후일 1831년부터 한국의 선교를 맡게된 파리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이다.



5. 학자(學者)들과 서학(西學)의 만남

조선은 명(明)나라 때로부터 병자호란 이후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침략을 모면하기 위하여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며 해마다 성절사(聖節使) 원단사(元旦使) 동지사(冬至使) 천추사(天秋使)와 임시사절로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등의 사절(使節)을 중국에 보냈고 정사(正使)부사, 서장관 등으로 정사는 정승 또는 육(六)조의 판서가 담당하여 때로는 200여명의 사절단을 대동하고 한번 북경을 다녀오는데 다섯 달이 걸렸다. 사절단은 한달 반 정도 북경에 머물면서 문물을 보고 듣기도 하며 명소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그중 즐겨 찾는 명소 가운데 네 곳의 천주당이 있었는데 우리 사절단은 북경성내 동남쪽에 있는 옥하관(玉河館)에서 머무르게 됨으로 거리가 가까운 동당과 남당을 찾아 구경을 하였다. 남당은 1601년 선교사 마태오리치(Matteo Ricci)가 선무문(宣武門)안에 세운 천주교회당이며 동당은 동안문(東安門)안에 있는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이 살던 곳에 세운 천주교회당이다.


1603년 마태오리치가 출판한 천주실의(天主實義)도 이러한 연관으로 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주자학(朱子學)의 명분만을 일삼아 허례허식과 당쟁에 염증을 느낀 유교학자들도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의 이기(利器)와 문물(文物)그리고 과학서를 통한 서양문명의 힘에 점차 눈을 뜨게 되어 실증(實證) 실용(實用)의 추구로 실학(實學)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학(實學)의 선구자 중의 한사람인 이수광(李睟光-芝峰 1563~1628)은 3번이나 명(明)나라의 사신으로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북경에서 서양과학 서적과 천주교 서적을 입수하여 돌아와 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논평하면서 그 서두에 “천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으며 안양지도(安養之道)로 세상을 주관하심을 논했다고 밝히고 사람의 혼이 불멸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짐승과 크게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고, 불교의 윤회육도(輪廻六道)가 잘못되었음과 인성은 본래 착함을 말했다고 하면서 교화황(敎化皇 = 敎皇)을 소개했다” 같은 시대의 유몽인(柳夢寅 1559~1624)도 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천주실의에 대한 내용을 술 하면서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고.

○이익(李瀷 1681~1763)은 서학(西學)의 대가로 천문, 지리, 의약 율산(律算)에 밝았고 천주실의를 연구 천주교의 윤리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와 세유(世儒)가 무실(無實)한 학품임을 배격하고 실증적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서학의 설이 타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진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이명(李頤命 1658~1722)(좌의정을 지낸 노론의 4대신의 한사람)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현종 때의 학자, 도, 불, 병 에 정통 서학이 들어오자 서학변을 저술)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정조때 주자학의 대가 저서 천학고“天學考”등 ○이헌경(李獻慶 1717~1791, 영조때 학자) ○박지원(朴趾源 1731~1805, 이조후기 학자, 자연과학에 열중 지동설을 주장 실학연구에 힘씀. 청나라에 갔다와서 열하일기를 저술 당시 사상계에 영향을 줌) ○홍양호(洪良浩 1724~1802 博學者로 당대에 유명한 학자)등으로 당대의 석학들이 새로운 학풍인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서학을 학구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많았으나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받아 드린 학자는 몇 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중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 1569-1618)은 어우야담에서도 천주교인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국사대사전(이홍직 박사편)에서 1603년 북경을 왕래하면서 천주교를 신봉 연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1610년 중국에 가서 게(偈)12장을 가지고 와서 유학자들과 논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게(偈)12장이란 카톨릭교의 기도문이었다. 허균의 벼슬은 이조판서 의정부 참찬에 이르고 이조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남매간이었다.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3의 한국 순교 성인 (퍼 온글)  (0) 2012.09.12
대구 선산읍 교회 100년사 중-2  (0) 2010.10.06
황사영백서 전문  (0) 2010.05.24
황사영백서 한글본  (2) 2010.05.23
성 야고보  (0) 20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