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대구 선산읍 교회 100년사 중-2

코람데오 요세비 2010. 10. 6. 15:16
제1장 천주교 (天主敎) 의 전래(傳來)

제 2절 한국천주교(韓國天主敎)의

창설(創設)과 수난(受難)

1. 이승훈(李承薰)의 입신(入信)

서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이승훈(李承薰) 이벽(李蘗)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등으로 이들은 천주학에 대한 더 깊고 확실한 연구를 하는데 필요한 서적과 자료를 구하려고 고민하던 중, 마침 이승훈이 1783년(정조7) 동지사(冬之使)겸 사은사(謝恩使)로 가게된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 때 이벽이 찾아와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학자들을 만나 수계범절(守誡凡節)을 알아 필요한 서적을 가지고 돌아 오라 생명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그대의 손안에 있으니 경솔히 처신치 말라”고 당부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남인 학자의 가정에서 출생 25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1789년 평택 현감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1783년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서양 학문을 넓히고 예수회 선교사들과 여러 번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면서 그 도덕적 교훈과 교리를 깨달아 신앙을 고백하고 북경의 북당에서 1784년 2월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공개적으로 영세를 받음으로 한국 최초의 영세 교인이 되었다.

그의 신앙이 한국교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Pierre Peter 반석)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이승훈은 1784년 3월 여러 가지 교리서와 십자고상(十字苦像)성화, 묵주(黙珠), 기하학(幾何學)등 서적을 가지고 들어와 이벽에 넘겨주고 그는 주로 중인층계급(中人層階級)의 사람들에 전교를 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진리 7성사 공교요리(公敎要理)복음해설등을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리에 대한 확신을 얻어 당시의 사정으로 성직자도 아닌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영세명은 요한 이었다.

이때부터 이벽은 중인과 양반들을 대상으로 전교하기 시작하였고 유학의 대가인 이가환(李家煥)이 이벽을 설득하려 왔다가 그의 정연한 논리와 명확한 실증 앞에 도리어 설득을 당하여 천주교인이 되었으며, 이벽의 전교에 의하여 입교(入敎)한 사람들은 권일신(權日身) 권철신(權哲身)형제와 정약용(丁若鏞)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의 세 형제였다. 이들은 1785년 봄부터 서울 진고개에 있는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때에 따라 모여서 교리강론도 하니, 몇 달만에 그곳에 모이는 교인의 수가 수 십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시작한 교회위에 박해의 손길이 뻐쳤고 교인들의 신앙은 박해와 순교의 수난 속에서 성장되고 확산되어 갔다.

1785년 형조(刑曹)에서 진고개 김범우의 집을 급습 여러 명을 체포한 뒤 양반들은 훈방하고 김범우만 옥에 가두어 모진 형벌을 가하여 충청도 단양으로 정배를 보내니 거기서 수주일 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벽도 부친이 목숨을 걸고 설득함에 굴복하여 배교함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던 중 1786년 봄에 열병으로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가서 자산어보(慈山魚譜)를 썼고 정약용은 강진에 귀양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였으며 정약종과 이승훈은 1801년 2월 26일 신유교란(辛酉大邪獄)때 서대문 네거리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선진들의 거룩한 희생과 순교의 피가 한국기독 교회사에 오래 오래 남아 값진 열매를 맺게 할 것이며, 진 고개에 있던 김범우의 집 자리 주변에는 명동성당이 우뚝 솟아 한국천주교회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신해교난(辛亥敎難 1791 정조15)

천주교가 인조(仁祖)를 거쳐 영조(英祖)때에는 서해안 지방과 관동지방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그 지역에 한정되어 있어 조정에서는 촌민(村民)들의 무지한 소치로 보고 별 일없이 자나갔다. 그러던 것이 1791년 신해년에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윤지충(尹持忠)이 그의 모친상을 당하여 외측 형인 권상연(權尙然)과 두 사람이 천주교식 제례를 지낸다고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르는 사건이 있었다. 윤지충은 진산 사람으로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서울에 와 김범우의 집에서 내종형 정약전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사람이다. 윤지충의 사건은 조야(朝野)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유교와 유학을 숭봉 해야할 사림(士林)이 패륜외도(悖倫外道)로 나라의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백성을 현혹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부모도 없고 임군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한 죄명으로 조정에서는 진산군수를 시켜 이들을 참형시킴으로 이 사건이 최초의 교난이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호남의 선비들은 대개 남인이었으며 남인 중에 당시 상신(相臣)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중심으로 서교를 믿는 것을 묵인한 신서파(信西派)와 이에 반대하는 홍낙안(洪樂安)을 중심으로 한 공서파(功西派)가 체제공이 정조 17년에(1793) 영의정에 임명되자 공서파가 신서파를 더욱 못 마땅히 여겨 신해교란이 더욱 심각한 결과를 가져 왔으며 그 후 10여년간 공서파와 신서파의 대립이 신유교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신해 교란의 여파로 권일신은 귀양보내고 이승훈도 예산(禮山)쪽으로 정배를 갔고 홍문관(弘文館)에 소장된 많은 서양서적들을 불태웠으며 개인 가정에 소장하고 있던 서양 서적들도 자진해서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엄명을 내렸다.


3. 주문모(周文模)신부(神父)의 전도 활동

권일신과 이승훈이 교리서를 연구하던 중 성직(聖職)에 대한 의문점이 있어 윤유일(尹有一)을 1789년 10월 16일 동지사 일행에 끼어 북경에 보내어 구배아(Gouvea)주교를 만나고 1790년 2월 로(M.Raux)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 후 성직자 파송을 청원하기 위하여 1790년 5월 다시 사은사 일행에 끼어 윤유일은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 성직자 파송을 요청했으나, 신해교란으로 실패하여 1793년 윤유일과 지황(池黃)을 다시 북경으로 보내어 구베아 주교를 방문하여 성직자 파송을 요청한바 강소성 소주(江蘇省蘇州)출신 주문모(周文謨)신부가 1794년 12월에 밀입국하여 1795년 1월 서울에 숨어 들어와 역관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숨어 조선말도 배우고 세례도 주고 미사를 드리기도 하던 차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신부는 피신시키고 윤유일과 지황이 잡혀가 모진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최초의 천주교 여인 회장으로 활동하던 강완숙(姜完淑)의 집에서 숨어살면서 6년 동안 전교활동을 하는 동안, 그가 입국할 때 신자가 4,000명이던 것이 5년 후에는 10,000여명이 되었다.

그러나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주 신부의 화상을 각처에 붙이고 현상금을 걸고 체포령이 내렸다.

국경을 넘어 피신하려던 주 신부는 자기 때문에 수많은 교인들이 처참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 가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어 1801년 3월 16일 의금부에 자수하니 음력 4월 19일 새남터에서 참수(斬首)당 했다.


4. 신유교란(辛酉敎難 1801 순조1)과 백서사건(帛書事件)

신유교란은 당쟁(黨爭)으로 인한 천주교의 수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791년 신해교란 후 조정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간에 늘 논쟁이 있었으나 신서파의 채재공과 신서파에 온건했던 정조(正租)가 죽고 순조(純組)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섭정(攝政)을 하게되니 벽파(辟派)와 시파(時派)간의 세력 다툼이 일어났고 정순대비는 벽파쪽에 손을 들어주던 인물이었다. “시파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억울한 죽음을 동정하던 파(派)를 말하며 남인(南人)들이 많았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공격하던 파(派)로 노론의 인물들이었다.

벽파는 노론과 남인의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시파와 남인의 신서파(信西派)를 종교적인 문제를 내세워 모함하고 사교(邪敎)로 배격하며 천주교에 대한 대금압령(大禁壓令)과 1801년 1월10일에 대왕대비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력히 실시케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사교 사학(邪學)을 엄금 근절토록 하라는 명이 내려서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沈換之)와 공서파의 대사간(大司諫) 목만중(睦萬中)이 시파와 남인측의 천주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유년 1801년 2월에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은 옥사했고 2월 26일에는 정약종(丁若鍾) 최필곤(崔必恭) 홍교만(洪敎萬)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이승훈(李承薰)등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수 당했으며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은 귀양을 가고 2월 28일에는 이단원(李端源), 3월13일에는 여주에서 이중배(李中倍) 원요안 임희영(任希永) 정종호가 양근에서는 유한숙(兪漢淑) 윤 야고보가 참수되었다.

종친(宗親)중에도 은언군(恩彦君) 인(絪)과 그의 부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尙溪君의 부인)도 사약을 받아 죽었고 5월 23일에는 강완숙(姜完淑)이 서소문 밖에서 죽었다. 이때 신유고난에 죽은 천주교인은 300명이 넘었다.

교난 중에 설상가상으로 황사영의 백서사건(黃嗣永의 帛書事件)이 발각되어 천주교 탄압이 정당했다는 대의의 구실을 주게 되었고, 백성들은 천주교를 대역모반(大逆謀反)의 매국(賣國)적 종교로 불신을 하게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사건(黃嗣永의 帛書事件)이란 그 내용을 간략하면, 황사영은 창원 사람으로 정약현(丁若鉉)의 사위다. 17세에 진사에 급제한 재능으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로써 신유교란을 만나 제천배론(堤川舟論)산골에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서 피신 하던차 그를 찾아온 황심(黃沁)의 이름으로 흰 명주에 13,384자(字)에 달하는 진정서를 써서 청국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主敎)에게 보내려고 하던 중 발각되어 황심 옥천희(玉千禧)가 1801년 9월 29일에 체포되고 황사영도 10월 3일에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됐다. 왕이 직접 백서를 보고 이들은 다 처형되었으며 황사영은 그때 나이 27세로 1801년 11월에 대역모반 죄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고 모친은 거제도에 처는 제주도에 자녀들은 추자도에 각각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 백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첫째, 당시 국내 정세의 흐름과 천주교 탄압 과정에 대한 제보와 순교자들의 사역(事歷)을 설명

둘째, 박해의 동기와 참상, 당쟁의 역사적 관계와 경제적 궁핍을 구제할 경제적 원조를 요청하고

셋째,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의 명령을 얻어 천주교를 용납토록 압력을 가하고

넷째, 이씨 조선은 이제 쇠하여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선을 청나라에 예속시키고 안무사(按撫使)를 평안도에 두고 친왕(親王)으로 조선을 감독 보호하게 하고

다섯째, 조선은 200년 동안 평화하여 백성은 전쟁을 잘모르니 배 수백 척과 정병 5,6만 그리고 대포 등 군물(軍物)을 가득 싣고 우리나라를 쳐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할 것을 진정했다.


5. 기해교난(己亥敎難 1839 헌종 5)

1801년 신유교란 이후 천주교의 교세가 약화되었으나, 그 후 교세가 점차 늘어나 1831년에는 프랑스의 외방전교회(外邦伝敎會)에서 북경교구와 조선교구를 분립시키고, 1836년(헌종2)에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이 들어오고 뒤이어 샤스땅(Chastan)과 양베르(Imbert)신부가 들어와 비밀리에 선교 사업에 몰두한 결과 교인의 수가 9,000명에 이르렀다.

조정의 형편은 효명세자가 죽은 후 아들 헌종이 임금이 되었으나, 순조의 부인 김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으며 효명세자의 부인은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이었다. 이 때 풍양조씨 일파가 세도를 잡고 순원왕후를 몰아 내기 위한 책동에 의해 일어난 박해였다. 순원왕후는 남편 순조(純祖)와 아들 효명세자가 병으로 앓고 있을 때 교우(敎友)였던 정약용으로부터 의술의 도움을 받았던 인연도 있고, 궁내에 천주교 신봉자가 수명이 있어 천주교에 대하여 온건정책을 취해 왔던 것이 빌미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인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묵과 할 수 없다하여 천주교 박해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여 기해년 3월 우의정 이지연은 김대왕대비께 천주교 박멸정책을 주청하니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에 대한 대학살이 일어났으며 풍양 조씨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박해하니, 4월 12일에 권인득(權仁得)이하 8명이 처형되고 전주등 각 지방에서 많은 교인들이 살육 당하였다. 7월에는 주교 모방과 샤스땅 및 양베르신부가 체포되어 8월 14일 한강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되니 서양 신부로서는 처음 순교자가 되었다.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쓴 정하상(丁夏祥)은 정약종의 아들로 1816년(순조16)북경에 가서 피래스(Pires)주교를 만나 조선에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25(순조 25)년에는 유진길(劉進吉) 이여진(李如眞)과 연명으로 로마 교황에 편지하여 조선교구를 설치케 하는 공을 세웠던 정하상이 기해교란이 일어나자 3,400자에 이르는 문장으로 천주교의 교리가 참되다는 내용과 천주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을 상서형식으로 조정에 호소하는 상제상서의 글을 지었다. 정하상은 1839년 9월 22일에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형장에서 참사를 당하였다.

1839년 11월 23일(헌종5)조정에서는 조인영을 시켜 척사윤음(斥邪淪音)을 짓게 하여 천주교리의 죄목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천주교는 혹세무민하는 망국적 사교이므로 국금(國禁)으로 정함을 백성들에 공포하니 이 척사윤음이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가중시켰고, 1840년 12월까지 순교한 사람의 수가 113명에 이르고 그 중에는 79세된 노파에서 5세 된 어린아이도 있었다.


6. 김대건 신부(金大建神父)의 순교(1846 헌종12년)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내포(內浦)현 당진군 우강면 신종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조부와 부친이 모두 순교하였다. 1836년 16세 때 모방신부의 주선으로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을 하게 되었으며, 그는 1845년 8월 17일에 한국인 최초로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0월 12일 페례올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江景)을 거처 서울에 몰래 들어와 포교하던 중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안내하기 위하여 사전에 수로를 통하여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려 떠나던 도중에 연평도(延坪島)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간단한 지리서를 편술 했고 영국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헌종에 게 바치기도 하여 김신부가 총명하고 과학적 지식이 많음을 보고 그의 엄벌을 3개월이나 지연하면서 그를 회유코저 하던 중, 프랑스 함대 3척이 1846년 6월 20일 충청도 외연도(外延島)앞 바다에 와서 기해교란 때 순교한 프랑스 신부 3인에 대하여 그들의 참형을 힐책하며 조선 조정을 위협하고 돌아감으로 이에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장으로 1846년 9월 15일 헌종은 그를 사형하라는 영을 내리니 다음 날 세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참형을 당했다. 그 후 교황으로부터 1857년 9월 23일 가경자(可敬者)의 칭호와 1925년 7월 5일 복자 칭호도 받았다.


7. 병인교난(丙寅敎難 1866, 고종 3년)

신유교난(辛酉敎難)때 종친(宗親)으로 사교의 신자라 하여 두 내외가 사약을 받아 죽은 은언군(恩彦君)의 직손인 철종(哲宗)이 1850년에 즉위 한 후 종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이를 계기로 1855년에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누(Simon Francis Berneux 張敬-)신부와 리델(Ridel)등 수명의 신부가 들어와 선교사업에 열중한 결과 교세의 확장이 크게 늘어나 1861년(철종12)에는 교인의 수가 18,000명으로 늘어났고, 1865년(고종2)에는 23,000명으로 늘어났으며, 국내에 잠입한 외국 선교사의 수가 12명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천주교인의 수가 급증하는 것이 교난의 요인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대원군이 본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거나 적대시하지 않았다. 대원군과 그 측근이 이 천주교에 대하여 우호적이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그가 천주교인에 대한 대학살을 하게된 동기는 제정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쓰면서 1864년(고종1)함경도에 여러 번 침공하며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 때 대원군과 조정에서는 당황하면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이때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鐘三)등 천주교인들이 대원군에 건의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협조를 얻어 조, 영, 불(朝, 英, 佛)의 삼각 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공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대원군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베르누 주교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을 받고도 천주교 측에서 기밀하게 응하지 못하고 베르누 주교가 정치 문제에 개입을 꺼려, 만족할 만한 회답을 주지 못하다가 주교가 지방에서 서울에 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러시아인들은 떠나간 뒤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원군을 도왔던 조대비(趙大妃)를 비롯 대관(大官)들과 조야를 막론하고 사교금압(邪敎禁壓)을 강행 할 것을 호소하며 비난의 글이 사방에서 올라오자 대원군도 천주교도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1866년 봄에 천주교 탄압에 대한 교령이 포고되니 이로 인해 선교사 12명중 9명이 참형을 당했으며 남종삼 홍봉주도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3년 동안 교란으로 인하여 순교한 교인의 수가 8,000명이나 되고 산중으로 피신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은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 였으며 천주교인이 아닌 자들도 박해를 당한 이가 허다하였다.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답동 성당  (0) 2013.03.19
103의 한국 순교 성인 (퍼 온글)  (0) 2012.09.12
대구 선산읍 교회 100년사 중-1  (0) 2010.10.06
황사영백서 전문  (0) 2010.05.24
황사영백서 한글본  (2) 2010.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