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Louis Marie Grignion de Monfort 은 1673년 1월 31일 프랑스의 서북부 지역 마을인 몽포르 라 깐(註. 지금은 ‘몽포르의 쉬르 므’로 지명이 바뀜)에서 태어났다.
루도비코가 태어나던 해, 예수님께서는 파리에 있는 파레 르 모니알Paray-le-Monial의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Margarita Maria Alacoque 1647-1690 수녀에게 발현하셔서 당신 성심의 불타는 사랑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다.
루도비코의 아버지 요한 그리뇽1649-1718은 라 바쉘르레의 공작으로 지주였으며, 어머니는 혈통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18명의 형제 중 둘째였으나 맏이가 생후 5개월 만에 죽었기 때문에 맏이 노릇을 하였다. 그리뇽 일가는 어디를 가든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만 루도비코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남다른 이름을 지니는 것도 바라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이름을 루도비코 그리뇽이 아니라 그저 ‘몽포르의 루도비코’라고 정하기로 하였다. 그는 나이 아홉 살이 되어서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부모와 삼촌인 로베르 신부, 그리고 여러 신부들에게서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루도비코는 불과 열두 살 때 집에서 약 23km 떨어진 렌Rennes 에 있는 성 토마스 아 베케 대학에 들어갔다.
이 대학은 갈리카니즘Gallicanism과 얀세니즘Jansenism이라는 이단에 대적해서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고, 또한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회가 이 학교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학업이나 신앙심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선한 마음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공부도 매우 잘했지만,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감실 앞에서 혹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다. 어느 날 성 소베르의 가르멜 성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모님께서 “너는 사제가 될 것이다”라고 그의 마음속에 아주 다정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루도비코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뿐만 아니라 성모님에 대해서도 큰 사랑과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가 어려서부터 17명의 자녀들에 대하여 항상 고민하던 어머니에게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하신 하느님과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하늘에 계신 성모님께서 우리들을 잘 돌봐주실 거예요.”라고 말하며 위로해 드렸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의 형제들 중에서 세 명은 사제, 네 명은 수녀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묵주를 손에 들고 자랐다. 그는 동생들이 기도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묵주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학교에서는 급우들을 설득시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는 성모님의 성화나 성상만 보아도 기뻐하였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두 시간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되었다. 그의 집에는 동생들이 너무 많아서 모친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 준 어머니보다 천상의 어머니가 더욱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견진성사 때 성모님의 이름을 세례명 루도비코에 덧붙여, 루도비코 마리아가 되었다.
루도비코가 학교에 들어간 지 몇 년이 지나서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렌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렌에서 사업상 아버지를 만나러 온 ‘드 몽띠뉘’라는 여인을 통해 당시 全世界 모든 신학교의 표본이었던 파리의 성 쉴피스St.Sulpice 신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더욱이 그녀는 루도비코가 성 쉴피스 신학교에 진학할 경우 모든 후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신학교는 많은 성인들의 빛인 쟌 쟈크 올리에Jean-Jacques Olier 1608-1657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 신학교야말로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집’이었다. 창설자 올리에 신부는 어렸을 적부터 모든 것을 성모님과 의논하였으며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가가는 분이었다.
그는 성모님의 노예 그리고 성모님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노예였다. 어디를 가든 그는 성모님의 성화와 성상들에 정성껏 경의를 표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신학교의 모든 사제들이 성모님께 봉헌되기를 바랐다. 루도비코는 1692년 가을에 바로 이 성 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렌에서 파리까지 350km나 되는 거리를 열흘 만에 걸어서 갔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 여행길에서 그는 제일 처음 만난 어느 불쌍한 사람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었고, 불쌍한 두 번째 사람에게는 돈을 다 털어주었으며, 더욱이 그 열흘 동안 많은 비를 맞았지만 몸을 말릴 곳을 찾을 수 없었던 탓에 파리에 도착할 때쯤엔 마치 거지나 부랑자처럼 보였다. 신학교에 나타났을 때, 신학교의 관계자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인 그에게
그대는 좀 더 가난한 자들이 가는 학교로 가야 할 것 같소.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미망인들과 고아들이 많았고 백성들은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곧장 신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바르몽디에르 신부가 세운 작은 공동체에서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그의 후원자였던 드 몽띠뉘도 파산하여 그를 후원해 줄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지키며 밤을 세워주는 사람에게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는 그 일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는 1700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캐나다에 가서 원주민 인디언들의 선교사로서 일하고 싶어 했으나 장상들이 거부하였다. 장상들은 자기네처럼 처신하지 않고 별난 고집으로 유난스레 열심히 생활하려는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제가 된 후 몇 년간은 여러 가지 일을 맡았는데 처음에는 낭트에서, 다음에는 푸아티에에서 시립병원의 원목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 병원은 빈민 수용소․ 양로원․ 진료소․ 수술실을 겸한 건물로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도시 빈민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마리 루이즈 트리세를 만나 그녀와 함께 ‘지혜의 딸들 수녀회’를 창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로마에 총 본부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4,000여명의 수도자들을 탄생시켰다. 루도비코는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를 늘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우연히 고향을 지나가게 되자 어릴 때의 유모한테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갔다. 마침 유모는 외출 중이었고 그녀의 사위가 유모의 명령이라면서 나그네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루도비코는 다른 집에 가서 부탁해 보았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누추한 집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나온 노인이 그를 따뜻이 맞아 들였다. 그 노인은 잠시 후 나그네가 그 고장 출신으로서, 바로 살아 있는 성인으로 알려진 루도비코임을 알아보았다. 새벽녘 집 밖에서 소리 내어 울먹이는 사람들이 한 떼 모여 있었다. 루도비코에게 숙식을 거절하였던 이들이 용서를 청하며 축복을 받으려고 왔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유모도 끼어 있었다.
그는 아침 식사에 초대하는 유모의 청을 받아들이면서 부드럽게 훈계하였다. “유모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내게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그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제부터 가난한 사람이 유모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하면 할 수 있는 대로 다 해 주세요. 유모가 그에게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될 테니까요.” 사제로 서품된 후 1700년에서 1716년까지 그는 문자 그대로 걸어서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혜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전하였다. 루도비코 성인의 생애 마지막 16년 동안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위한 도보행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16년 동안 그는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가 당한 모욕과 푸대접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그를 학대한 자가 누구인가? 성 루도비코는 얀세니즘이 만연한 시기에 태어났다. 얀세니즘은 1640년 네덜란드 출신 얀세니우스라는 주교에 의해서 일어난 이단이다. 얀세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오로지 ‘정의의 하느님’이었지 결코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얀세니스트들은 사랑 대신에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내세웠다. 그들은 엄격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루도비코가 태어난 1673년에 주님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발현하셔서 당신의 성심을 보여주시며 이것은 내가 너희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데도 단지 배은망덕과 냉대만을 받는 내 성심이란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계시해주셨다. 루도비코는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죄인들의 구원에 대해 늘 강조하며 다녔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얀세니스트들이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고, 그는 성모님께 대한 진실하고도 애정 깊은 신심에 대해 가는 곳마다 열정적으로 강론하였다. 이로써 그는 수많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제들까지도 회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루도비코는 많은 교구에서 추방당해야만 했다.
그는 파리의 성 쉴피스 신학교에 가서 은사들을 만났으나 그들까지도 그를 냉대하였다. 그는 이제 프랑스 내에서 사면초가가 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 그는 1706년 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제243대, 재임기간 1700-1721)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까지 걸어서 갔다. 교황을 알현하게 된 그는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과 함께 교황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여쭈었다. 교황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당신의 조국 프랑스에 돌아가서 일하시오.
그곳은 당신이 몸바쳐 일할 수 있는 넓은 들판과 같습니다. 얀세니스트와 싸우시오.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례 때의 서약을 갱신하도록 가르치시오. 그리고 항상 주교에게 순명하시오.” 교황은 루도비코에게 ‘교황 파견 선교사’Apostolic Missionary라는 칭호를 주고 그가 지닌 십자가에 축복하였다. 또한 교황은 임종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십자가에 친구親口하는 사람에게 전대사全大赦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때 루도비코의 나이 33세였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 충실한 선교사로서 생활하였다. 아니, 죽은 후까지도 선교 사업에 충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마리아의 동반자’라는 남자 선교 수도회를 창설․ 지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서부 지역 7개 교구에서 선교사인 동시에 설교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끊임없이 지도하고 가르쳤다. 1716년 4월 28일 그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느끼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는 임종 때에 성모 마리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목과 팔다리를 쇠사슬로 묶었다.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영위한 그는 생 로랑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그곳 쉬로 세브르 교회의 성모 경당에 묻혔다.
성 루도비코는 43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무엇보다도 두 가지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중 하나는 얀세니즘이라는 이단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의 그의 승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그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인 1713년 얀세니즘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파문을 당하였다. 또 하나는 마리아론聖母學,Mariology의 정립이다.
그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마치 우리 육신이 공기로 숨쉬는 것처럼 영혼은 마리아를 호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전파했다. 마리아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도 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세례 때로 돌아가기 위한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봉헌’을 마리아께 대한 가장 완전하고 참된 신심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성모 신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걸작품으로서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책 중의 하나이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심에도 크게 기여해 온 책으로 평가되고 잇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일컬어 ‘현대 마리아의 영성의 기초가 되는 책’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통설에 의하면, 이 책은 성인이 죽기 4년 전인 1712년에 쓰여 졌다고 한다. 성인은 평소에 선교하면서 신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정리하여 엮었는데, 저술 동기와 목적은 “마리아의 참된 신심가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참된 신심』, 110-111항 참조).
오늘날에도 마리아를 주제로 택하는 저술가라면 이 『참된 신심』과 그것이 마리아론聖母學에 미친 영향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신심을 구현하기 위해 33일 간의 준비 과정을 거치는 「봉헌 예절」이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을뿐 아니라 많은 전대사와 함께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 책을 지니고 다니면서 애독하였으며 주교 수품 때에는 이 책에 기록된 ‘Totus tuus'(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참된 신심』,233항)를 생활 신조로 삼아 변함없이 성모께 의탁해 오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참된 신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참된 신심』,227항)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모 신심에 대한 다섯 가지 기본 진리는 다음과 같다(『참된 신심』,61-89항 참조).
(1)마리아에 대한 참된 신심의 궁극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2)우리는 전적으로 예수와 마리아의 ‘사랑의 종(노예)’이다.
(3)우리는 죄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4)우리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또 하나의 중재자인 마리아가 필요하다.
(5)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필요하다.
사실 이 다섯 가지 진리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수덕적인 원리들이다. 『참된 신심』은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저술한 『영신 수련』의 영향을 받았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성 루도비코가 소년시절 예수회 학교의 학생이었고 『참된 신심』역시 『영신 수련』이 보여준 과정처럼 신학적 기초 원리들로부터 시작하여 성모님께의 봉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신심』에는 사목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모든 사람들 “특히 신심을 쉽게 받아들이는 단순하고 가난한 이들”(『참된 신심』,26항)을 대상으로 삼아 그리스도와 인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능동적인 역할을 널리 알리려하고 있다. 성 루도비코는 영혼들을 돌보는 사목자들이 구원 경륜과 전례 생활에서 마리아의 모성적인 역할을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세례 때의 상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즉 세례 때의 서약을 매일 갱신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목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성 루도비코는 사제이며 예언자였고 사도이며 개혁자였다.
그는 마지막 시대를 예언자적 식견으로 바라보며 성모님의 시대를 예언하였다. 성 루도비코는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뿐 아니라 이 책의 축소판인 『마리아의 비밀』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 외에도 『묵주 기도의 비밀』,『십자가의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완전한 지혜에 대한 사랑』등 수많은 훌륭한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ꡒ이 작은 책을 이빨로 물어뜯기 위해서 으르렁거리면서 분노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은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어두운 구석이나 궤짝 깊은 곳에 처박아두게 할 것이며, 더욱이 이 책을 읽어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박해할 것이다.ꡓ(114항)라는 그의 예언대로,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1842년 4월 21일, 성인이 세상을 떠난 지 126년만에 발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예언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예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ꡒ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좋은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나에게 용기를 주며, 놀라운 성공을 거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즉, 장차 다가오는 시대에 세속과 악마와 부패된 본성과 맞서 싸울 막강한 군단Legio, 즉 용감무쌍한 남녀 군사들로 이루어진 예수 마리아의 군단이 나타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독자는 알아들으라(마태24,15).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19,12).ꡓ(『참된 신심』,114항). 그 후 210년 만에 출현한 레지오 마리애의 세계적인 확산은 그의 예언이 다시 한번 적중하였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8년에 그를 가경자可敬者로 선언하였고, 비오 9세는 1853년에 그의 모든 저서를 공인하였으며, 레오13세는 1888년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한편 그를 수호자들 중의 하나로 모신 레지오 마리애가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기도문을 외울 때 늘 몽포르의 복자 루도비코를 기억해서인지 교황청에서도 이를 중시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1947년 7월 20일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그가 운명한 날인 4월 28일이다. 생애를 통한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1)모든 것을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서 할 것. (2)우리의 육신을 영혼의 종으로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성모님께 대한 불같은 사랑, 극빈자․ 환자․ 소외당한 자들을 위한 사랑,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만들 것. (3)그리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질러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봉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간절한 원의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가12,49). 이로써 교회는 신자들이 이 성인이 행하신 방법에 따라 생활한다면 하느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결합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엄숙히 인정하였으며, 모든 신자들에게 성인의 이 같은 본보기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이상은 『한국 레지오 마리애 오십년사』(한국 레지오 마리애 협의회 2003년 간행, 64-70쪽)에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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